2019년 5월 19일 일요일

PC 수리와 오진

1995년인가부터 동네 컴퓨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리도 하고 조립도 하고 개인적으로 팔기도 하고 가끔 삥땅도 치고... 뭐 그랬다.

21세기 초에는 노트북 리뷰만 주구장창 들고 파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무릇 노트북 리뷰는 이렇게 해야지!"라는 기준같은게 확립되지 않은 시기라 좀 이런 저런 삽질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노트북 키보드를 사진을 찍지 않고(디카 보급이 많이 안 돼있던 시절이라) 스캐너로 긁은건 아마 한국에서는 내가 최초가 아니었을까?

PC사랑이라고,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좀 쉬운 수준의 PC 관련 잡지인데, 거기 독자 엽서로 날아오는 질문에 답변해주는 원고도 작성했다. 나중에는 게시판에 답변도 달아줬다.(지금은 게시판 구조를 바꿨는지, 예전 질문답변이 검색이 안된다;)

어느 회사에서 일하든, 내꺼든 내꺼 아니든, 컴퓨터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냥 내가 나서서 손봤다.
전산실 담당자나 수리업자보다 내가 잘 해결하거든.


2009년 한국에 아이폰이 정식으로 들어오고, 내 주변에 아이폰 유저가 많아졌다.

"저놈이 윈도우PC는 좀 알아도 맥은 잘 모르겠지"

2010년 내가 맥북을 갖고 다니기 시작하니, 내 주변에 맥 유저가 많아졌다.

나 1997년부터 맥 사용했다. 오래된 애플빠다.
네이버 맥쓰사 카페에 내가 올린 답변글들
기꾼설 수리센터보다 문제 정확히 잡아낼 자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주변에 다들 집에 사과로고 한두개씩은 있게 됐다.
(님들 아이튠즈 엄청 싫어하지? 그래서 동기화도 안하지? 그게 다 윈도우를 써서 그래...)


어쨌거나 주변에서 나에 대한 시선은 "하여간 쟤한테 맡기면 그게 뭐가 됐든, 일단 원인은 잘 찾는 것 같더라"가 됐다.
그래서 PC든 맥이든,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연락이 온다.


연락이 왔다.

세탁소 매장 두개를 운영하시는 형님인데, 형수님이 담당하는 곳의 컴퓨터가 문제가 생겼단다.
이 컴퓨터로 접수부터 라벨출력까지 다 하는데, 갑자기 저절로 꺼지고 저절로 재부팅되고 그랬단다.
급한 김에 인근 PC 수리점에 맡겼는데, 뭐 잘 모르겠지만 트랙검산가 뭔가 했는데 조짐이 좋지 않댄다.
거기서 하는 이야기가 매장관리프로그램(단종. 지원도 공식적으로는 종료)계속 쓰고 싶으면 새 컴퓨터에 이 하드를 꽂아서 뭐뭐뭐를 하면 될 수도 있다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나한테 물어오신거다.
새 컴퓨터 한대는 있다카신다. 어디서 주워다놨는데 잘 켜진단다.

만약 이걸 못살리면 데이터 날라가는 것도 문제지만, 새 버전의 매장관리프로그램은 온라인버전이라서 매달사용료가 지출되고, 쓰지도 않는 인터넷회선도 세탁소에 들여와야 한다...

일단 저절로 꺼질때의 마지막 화면에 뭐가 나와있는지를 물어봤다.
하필 제일 흔하게 발견되는 블루스크린이다.

드라이버가 손상됐을 때에도, 하드웨어에 문제가 있을 때에도, 하드디스크가 이상할 때에도 등등등 매우 많은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블루스크린이다 -_-;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짜본다.

0. 일단 동네 컴퓨터가게에서 진단을 맞게 했다 치고, 하드디스크에 배드섹터가 발생했다 치자.
1. 그럼 더 늦기 전에 최대한 하드디스크에서 데이터를 뽑아서 땡겨와야겠네?
2. 땡긴 데이터를 압축한 다음,
3. 새 컴퓨터에서 그대로 실행되는지 먼저 확인한 다음에,
4. 실행 안되면(될 리가 없;;;) 문제의 하드를 통째로 다른 하드에 복제해서 부팅해야 하나?
5. 그럼 난 여분의 하드랑 하드 복제 툴이랑 윈도우 설치용 USB랑 라이브 파티셔닝 툴을 준비하면 되겠네?(왜 이런 준비물이 필요한지 이해가 안되면 당신은 아직 트러블슈팅할 준비가 부족한 사람이다)


출근을 안하는 토요일에 아침 일찍 세탁소에 도착했다.
오.... 나를 반기는 새 컴퓨터......
....
T사의 슬림형....
... 4가 어려워지게 생겼다.
아니. 경험 없는 사람은 1단계에서 브레이크다.


1. 데이터를 땡겨오자.

구 컴퓨터(이것도 S사의 슬림형;;)의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새 컴퓨터 뚜껑을 따고 연결했다. EFI에서는 인식하는데 윈도우10에서 나타나질 않는다.
...어? 윈도우10?
아... 문제의 소프트웨어가 XP 시절껀데 이건 땡겨와도 실행 가망이 거의 없겠구나...
슬림형 PC들은 대체로 파워서플라이 용량이 좀 타이트해서;; 두번째 하드디스크가 안 돌아가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내장된 DVD-RW를 분리하고나서야 정상적으로 인식됐다.
일단 문제의 세탁관리소프트웨어를 통으로 폴더째 복사했다.
예상한 시간 내에 복사가 잘 끝났는데?

...이거 배드섹터가 원인이 아닌 것 같은데?



2. 데이터를 압축해서 보관.

폴더째 복사했으니 폴더째 압축하면 된다.
마우스 오른쪽 버튼 눌렀더니 쓰레기알집 메뉴가 떠서 무시하고, 윈도우의 기본기능, 압축폴더로 보내서 압축.


3. 안될거 알지만 딱 한번만 속아보자. 그대로 실행.

런쳐부터 구동이 안된다. 될 리가 없지. 레지스트리 정보도 모르고 DB를 뭘로 돌리는지도 아직 모르는데;


4. 하드디스크를 통으로 복제해서
집어치워. 
이거 진단 잘못한거야. 두 개 물릴 외장케이스도 없고 파티션 이미지로 떴다가 덮어쓰기도 귀찮아.
애초에 그게 문제가 아닌걸?



새 컴퓨터를 옆으로 치워두고(최악의 경우에 새 컴퓨터에 있는 데이터를 사용해서 인터넷 들여오고 월요금 지불하면 사용할 수는 있으니까)

구 컴퓨터에 하드디스크를 빼고 부팅했다.
...아직까진 잘 되는데?

구 컴퓨터에 윈도우 설치 USB를 꽂고 부팅했다.
오우. 블루스크린.

Bad_Pool_Header

....이거 램 문제 아니야?

듀얼채널로 구성된 1GB 두개중 한개를 빼 내고 슬롯을 바꿔가며 테스트해본 결과...

문제의 DDR2 램
문제의 램 1GB만으로 부팅. 블루스크린.
그 외의 램 1GB만으로 부팅. 정상.

램 불량으로 판명.

아... 그럼 대체... 그 PC 수리점에서는 뭘 점검한건가...?
하드디스크는 괜히 왜 스트레스를 줘서 배드섹터 네개를 만들어냈으며...
나는 왜 무거운 3.5인치 하드디스크를 세개나 들고 온건가...

하아 =3



일단 1GB로 세팅해서 뚜껑 덮고 선 정리하고 체크.
다른 기능 모두 정상.
문제의 세탁관리소프트웨어.
데이터가 이상하게 떠서 마지막으로 정상동작했다는 날짜껄로 백업에서 복원.
조회기능에는 문제가 없는데 접수 기능이 오동작함.
화면에 뜬걸로 봐선 DB 세션을 털어야 할 것 같은데, 세션 데이터가 어디 있는질 모르니...
속는 셈 치고 고객센터에 전화시도.

이지아이세탁관리 구버전은 데이터를 정상동작했던 날짜에서 복원했을 때 뭔가 오동작하면,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ss6 폴더의 내용물을 싹 지워서 세션을 털어줘야 함.


끝.
작업 끝나고 약간의 향응을 제공받음...
다음주쯤 재방문해서 집에 굴러다니는 램으로 업그레이드 해 주기로 함.


님들은 이런 경우 당하기 싫지?
근데 직접 공부는 하기 싫고
수리업자가 아닌 내가 하는 말은 못 믿겠지? 수상하지?
그럼 그냥 돈 많이 벌어서 돈으로 때우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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